“뇌가 피곤하고 힘들수록 복잡한 맛에 대한 선호도 감소”
단순한 맛ㆍ추억의 할머니 음식 맛ㆍ전통 식재료에 주목
[헤럴드경제=육성연 기자]“단짠 맛에 빠져있었는데, 이제는 단순한 맛이 더 좋아졌어요. 어릴적 먹던 찹쌀떡처럼 추억의 음식이 그리워지네요.”
30대 여성 이모 씨는 최근 들어 어린 시절에 먹던 소소한 맛이 부쩍 생각난다고 했다. 이모 씨의 경우처럼 입맛이 달라진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땀을 뻘뻘흘리며 먹던 극강의 매운 맛, 늘 ‘진리’로 통하던 ‘단짠’(달고 짠 맛), 달고 매운 맛에 새콤함까지 추가한 ‘쓰리콤보’의 복잡한 맛이 이전처럼 매력을 발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원인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나타난 심리적 변화가 컸다. 각종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피곤해지면서 맛에서도 피로감을 느끼는, 이른바 ‘맛의 피로’ 현상이다.
음식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정서와 연관돼있다. 신재현 강남푸른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음식을 통해 생존의 욕구를 채운다는 것은 결국 ‘안도감’과 ‘안전함’과 같은 감정과 연결되기 마련”이라며 “음식에서 얻는 포만감은 호르몬 변화를 통해 정서적 만족감을 유발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지난해부터는 외부 활동의 제한으로 정서적 만족감을 받을 수 있는 경로가 줄어들자, 음식을 통해 위안을 얻고자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정서는 자극적이고 화려한 맛보다 상대적으로 ‘소소한’ 맛이 주는 위안이 더 클 수 있다. 미국의 트렌드분석업체 캔버스에잇(CANVAS8)은 최신 보고서에서 “뇌가 피곤해지면 이해력이 떨어지게 되는데 이는 맛을 이해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며 “정신적으로 피곤해질수록 더 복잡한 맛의 취향을 인식하고 즐기는 것이 어려워진다”고 했다.
최근 국제학술지 소비자심리학저널(Journal of Consumer Psychology)에 실린 연구 또한 “음식에 대한 취향은 소비자의 정신상태에 따라 달라진다”며 “코로나로 인한 피로나 불안 및 스트레스는 복잡한 맛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비영리기구 푸드포클리메이트리그(FOOD FOR CLIMATE LEAGUE)의 최근 조사에서는 많은 미국 소비자들이 이전보다 “친숙하고 간단한 요리에 더 끌린다”고 답했다.
한 가지 재료 맛을 살린 편안하면서도 친숙한 맛은 어릴 적 먹던 음식에 많다. 따뜻한 단팥죽 한 그릇처럼 어머니나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바로 그 추억의 음식 맛이다. 젊은층에서 인기인 ‘할매니얼’(할머니+밀레니얼세대를 합친 신조어) 트렌드처럼 팥이나 인절미, 흑임자, 단호박 등 소소하면서도 은은한 맛을 내는 전통 식재료들이 대표적이다. 커피전문점 투썸플레이스 관계자는 “지난해 3월 출시된 인절미, 흑임자 케이크는 카페 업계 ‘할매니얼’ 이슈로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며 “코로나 장기화로 자극적이지 않은 맛에 관심이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외에 빙그레 ‘투게더 흑임자’, CU ‘강릉초당 인절미 순두부콘’ 등의 관련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으며, 옛날스타일의 단팥빵 맛집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전부터 불던 ‘레트로’(Retro, 복고) 유행에 코로나가 주는 ‘맛의 피로’가 합쳐지면서 이러한 성향은 올해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는 2021 글로벌 소비자 트렌드중 하나로 ‘흔들리는 멘탈 관리’(Shaken and Stirred)를 꼽았다. 유로모니터 인터내셔널 코리아의 문경선 식품&영양 부문 총괄연구원은 “‘코로나 블루’(코로나19 확산으로 생긴 우울감)가 이어지면서 소비자들은 약이나 영양제보다 식품을 통해 자연스러운 정신건강 효과를 기대하는 심리가 크다”며 “올해 정신건강과 관련된 시장은 더욱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재현 강남푸른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대부분 추억의 음식에는 과거 좋았던 시절의 향수와, 아련한 그리움, 그리고 포근함의 정서가 함께 연결돼 있다”며 “음식의 맛과 냄새와 같은 감각적 자극은 뇌에 저장된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불러일으키는 탓에 지금의 삶이 힘들 때면 과거 추억의 음식을 더욱 찾게 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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